TEST SERVER!!

울산탐구-80년전 울산

입력 2003-06-01 00:00:00 조회수 86

◀ANC▶

 <\/P>1923년도의 울산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기록이 발견됐습니다.

 <\/P>

 <\/P>국립중앙도서관은 귀중본으로 분류해 소장하고 있는 개벽잡지 가운데 울산만초란 글은 당시의 울산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.

 <\/P>

 <\/P>울산탐구-1923년도의 울산을 김잠출기자가 소개합니다.

 <\/P> ◀VCR▶

 <\/P>국립중앙도서관이 귀중본으로 소장하고 있는 개벽 1923년도 8월호에 실린 수필인 울산만초.

 <\/P>

 <\/P>이 글이 실린 1923년은 일제가 겉으로 문화정치를 표방한 시기며 물산장려운동이 시작된 해입니다.

 <\/P>(시지-1)

 <\/P>당시 상주인구를 보면 중구중심의 울산읍이 6천명, 병영 인구는 4천 3백명, 그리고 언양은 2천2백명이었습니다.

 <\/P>(시지-2)

 <\/P>"울산을 알려거든 방어진을 보라"고 묘사된 방어진은 일본인이 조선인과 똑같은 숫자인 천8백명이 거주한 대일 수산기지였습니다.

 <\/P>(시지-3)

 <\/P>조선유일의 포경기지인 장생포는 해마다 100여마리의 고래를 잡았다고 돼 있습니다.

 <\/P>

 <\/P>흥미로운 것은 학성공원 아래의 꾸렁다리로 임진왜란 때 이장군이란 민간인이 쇠스랑으로 수천명의 적을 물리쳐 다리 밑에 무덤을 만들었는데 그 때까지도 냄새가 진동해 울산말로 꾸렁내 다리라고 불렀다고 합니다.

 <\/P>

 <\/P>또 1923년까지 학성공원 주위에 왜군 패잔병의 후손들이 남아 살았는데 자기들끼리 일본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.

 <\/P>

 <\/P>이밖에 학질을 물리치기 위해 바가지에 밥을 얻어 다리 밑에서 주술을 행하는 독특한 민간풍속이 소개돼 있어 일제시대 울산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.

 <\/P>

 <\/P>울산탐구 김잠출입니다.◀END▶

 <\/P>

Copyright © Ulsan Munhwa Broadcasting Corporation. All rights reserved.

여러분의 의견을 남겨주세요

※ 댓글 작성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담아 깨끗한 댓글 환경에 동참해 주세요.

0/300